2009년 10월 18일
[스크랩 동영상]태왕사신기 OST
태왕사신기 OST -
천년연가 by 동방신기
태왕사신기 OST - 담덕의 테마
# by | 2009/10/18 15:12 | 대한국의 문화 | 트랙백
태왕사신기 OST -
천년연가 by 동방신기
태왕사신기 OST - 담덕의 테마
# by | 2009/10/18 15:12 | 대한국의 문화 | 트랙백
|
아래글은 우선 정체성이 회복 되어야 함에 우선 공감합니다!!
제중동포(조선족)가 간도에 살고 있고 간도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을
이루고 살기까지의 간도 재중동포의 역사적인 역사 사실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나 있기는 하는지요^^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조선을 침략하여 우리민족의 성웅이신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그나마 물리칠수 있었듯이 !!
간도에 이주해서 간도 정착하기까지의 역사와
우리나라가 주권을 상실하여주권을 되찾아 독립하기까지
항일투쟁의 역사가 간도에 살고 있는
항일투쟁의 후예인재중동포(조선족)으로 알고있는 데요^^
그후 광복 되기까지 간도에 독립운동이 어떤과정을 거쳐는지!
중국공산당과 연합항일전선을 이루고 투쟁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서 일제 압제에 힘들게 고통 받다가 공산당이라는 이념에
휘둘려 공산당에 가입하여 민족분단후 중국에서 중국국적을 가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재중동포을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정체성을
회복 할려면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경제.문화.정치 교류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잘살도록하여 서로 이해하는 것이
간도 영유권 회복이전에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회복에 공감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의 성웅이신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그나마 임진왜란을 넘겨는데
간도에서 항일투쟁때에는 얼마나 좌우이념의 분열과
나라없는 설움 속에서 중국 내전에 동참하고 독립투쟁을 해야 했는지
우리는 역사을 제대로 알고나 나서 재중동포(조선족)을
사랑과 관심과 경제.문화.정치 교류을 활발히 해야 할때라 봅니다!
간도에 살고 있는 재중동포에게 사랑과 관심을.....
# by | 2009/10/17 10:05 | 동북공정-간도.대마도 | 트랙백
4분 39초
한국형이지스함tv팟 | 2008.06.16 tvpot_8646262_1
한국형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스크랩 동영상]노무현 대통령 연설 자주국방
노무현 연설 자주국방 부끄럽야지
2009.08.27 1^44 재생횟수: 205 | 출처: tv팟| tv팟에서만 검색
# by | 2009/10/01 17:13 | 대양 해군. 자주 국방 | 트랙백
아래글은 한국 해군이
물 새는 구축함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미해군이 1945년 운영하던 기어링급 구축함(DD)을
인수 하여 운영하고 그리고 퇴역 시키고
우리의 기술로
한국형 구축함(KD)을 건조하여
명실상부한 대양해군으로 커가고 있는
우리해군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originalstone/16687319
한국형구축함사업 KDX
해군은 1980년대부터 제해권 확보를 통한
국가이익 보장을 위해
원해작전 수행능력을 갖춘 대양해군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국형 구축함사업과 차세대 잠수함사업 등
전력증강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에 따라 한국형구축함사업은
1990년대 초부터 3단계로 나눠 추진해왔으며
그 첫단계(KDX-Ⅰ)로
3000t급 구축함 광개토대왕함(1996년 10월27일 진수)과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등 3척을 잇달아 취역시켰다.
이들 함정은 해군 최초의 현대적 구축함으로
대양해군으로 나아가는
해군의 시험적·선도적(Leading) 함정이라는 점에서
선언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자함 방어용
단거리 함대공 미사일 시-스패로를 탑재하는 등
전투전대의 주력 전투함으로
자체 대공방어능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본격 구축함으로서는 그 규모가 떨어지는데다
대공·대잠전투용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따라서
해군은 1000해리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본격적인 구축함이 절실했으며,
이러한 요구에따라
4500t급 2단계 한국형구축함사업(KDX-II)이
추진됐다.
1번함인 `충무공이순신'(忠武公 李舜臣)함이
2002년 5월22일 대우조선 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진수돼
2003년 11월께 취역을 했다.
이어 이번에
2번함 문무대왕함, 3번함 대조영함이 진수되었다.
충무공이순신함, 문무대왕함 및 대조영함은
전투전대의 지휘통제함 역할을 한다.
탑재수량과
사정거리를 증대한 중거리 함대공미사일 SM -Ⅱ과 RAM을
탑재하는 등
호송 전단 및 전투전대의 대공엄호가 가능하다.
해군의 대공방어 개념을
구역방어개념으로 전환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함체에 스텔스 기법을 도입,
적 레이더 탐지확률을 감소시켜 함정 생존성을 크게 높였다.
5인치 주포와 진보된 대잠수함 작전용 헬기를 탑재,
지상작전지원능력과 대잠전 능력도 대폭 강화했다.
대양해군을 향한 해군의 의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래전장 환경 및 주변국 전투함 발전 추세를 고려,
최첨단 통합함정용 전투체계인 이지스(aegis)체계를 갖춘
7000t급 구축함을 확보하는단계 한국형구축함사업(KDX-Ⅲ)을
강력히 추진하여 2008년 10월에 1번함인
세종대왕함이 취역하였다.
이지스체계는 SPY-1D(V) 다기능 레이더를 비롯한
함정의 전투구성 요소들을
네트워크로 한데 묶어 통합된 하나의 전술 상황정보를
만들어 내고 이를 실시간으로 전달함으로써
대함전·대잠전·대지상전·전자전 등
모든 전투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최첨단의 통합함정용 전투체계다.
기동전투단의 지휘통제함 역할을 수행한다.
KDX-Ⅱ란 2단계 한국형 구축함사업
KDX란
`한국형 구축함 사업'(Korean Destroyer, Experimental)을 말한다.
해군은 1986년 대양해군의 기치를 내걸고 이 사업을 본격 추진,
첫 결실(KDX-Ⅰ)로 3800t급의 광개토대왕함을
1998년 취역시킨 데
이어을지문덕함과 양만춘함을 잇따라 전력화했다.
해군은 이와 동시에 한 `체급' 높은 2단계 사업(KDX-Ⅱ)을
진행해 마침내4000t급의 충무공 이순신함을 진수하게 됐다.
1단계가 대양함대화의 첫발을 디디는 출발점으로
시험적 요소가 있는 반면, 2단계는 본격 구축함으로
대양함대의 주력화를 이루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해군은 현재 7000t급 이상의 이지스 전투체계를
갖춘 3단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이 종료되면 해군은 명실상부한 대양해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KDX-Ⅲ 이란
KDX(Korean Destroyer, Experimental)란
한국형 구축함 사업을 말한다.
해군은 1986년 대양해군의 기치를 내걸고
이 사업을 본격 추진, 첫 결실(KDX-Ⅰ)로
3800t급의 광개토대왕함을 1998년 취역시킨 데
이어을지문덕함 ·양만춘함을 잇따라 전력화했다.
해군은 이와 동시에 한 체급 높은 2단계 사업(KDX-Ⅱ)을 진행해
2002년5월22일 4000t급의 충무공 이순신함을 진수했다.
1단계가 대양함대화의 첫발을 내딛는 출발점으로
시험적 요소가 있는 반면,
2단계는 본격 구축함으로 대양함대의 주력화를 이루는 데
역점을 두었다.
KDX-Ⅲ 사업은 해군의 부족한 현존 전력 보완과
노후 함정을 교체하고 미래 안보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3단계 구축함 발전계획(KDX)의 마지막 단계로
2008년 1번함인 세종대왕함의 진수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총 3척의 함정을 국내 건조한다.
7000t급 이상의 이지스 전투체계를 갖춘 3단계 사업이 종료되면
해군은 명실상부한 대양해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
KDX-1 한국형구축함사업 1단계 (3000톤급)
1번함 광개투대왕함 1998년취역
2번함 을지문덕함
3번함 양만춘함
KDX-2 한국형구축함사업 2단계(4500톤급)
1번함 충무공이순신함 2002년취역
2번함 문무대왕함
3번함 대조영함
4번함 왕건함
5번함 강감찬함 2007년 취역
6번함 최영함
KDX-3 한국형구축함사업 3단계(7000톤급)
1번함 세종대왕함 2008년 취역
2번함
3번함
# by | 2009/08/10 21:03 | 대양 해군. 자주 국방 | 트랙백
되돌아보는 만주사(滿洲史)
이제 집필을 끝내면서 만주사(滿洲史)를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만주(滿洲)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유사(有史) 이래 처음으로
정착한 땅이었으며,
단군,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2000여 년에 걸쳐 지배했던
우리의 영토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부여가 북만주에서 약 400년 동안 주인으로
있었고,
부여와 함께 동이족(東夷族) 계열의 국가들이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한족 계열의 한(漢)나라가
만주의 서부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적이 있었고,
AD 1세기 이후 약 100년간은 역시 한족 출신인 공손(公孫)씨가
만주의 서남부 지역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한족 세력이 일시적으로 기승을 부렸다고 해서
우리 한민족의 만주 지배가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부여의 뒤를 이어
고구려가 만주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만주는 명실공히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잡았다.
BC 37년부터 AD 668년까지
705년간이나 만주 전역을 지배했던 고구려는
출발 초기에는 선비족 출신의 모용(慕容)시에 의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국세가 팽창,
중국 대륙과 당당히 맞서면서
동북아의 최강자로,
또 만주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의 수(隋)나라 및 당(唐)나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피폐해진 가운데
신라와 당의 협격(狹擊)을 받아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한족 국가인 당이 만주 서남부 일대를 일시적으로
장악한 듯싶었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지 31년 뒤인 AD 699년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이 진국(震國),
즉 발해(渤海)를 세움으로써
만주는 다시 우리 한민족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러나 한때 해동성국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무위를 떨쳤던 발해는
AD 926년 아보기가 이끄는 글안족에 의해 227년 만에
멸망함으로써
이민족(異民族)의 만주 지배가 시작되었다.
글안족이 이끄는 요(遼)는
만주를 지배하기 위하여 글안인과 발해인으로
구성된 동단국(東丹國)을 세웠으나,
동단국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요가 북중국으로 진출하자
만주에서는 발해 유민들이 세력을 결집하여
정안국(定安國)을 세움으로써
만주는 다시 우리민족이 되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요가 정안국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만주는 이민족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약 200년간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던
글안족의 요가 여진의 금(金)에 멸망당하자,
12세기 이후 만주는 여진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금은 요를 멸망시킨 위세를 몰아
송(宋)을 무너뜨리고
북중국과 만주 전역을 차지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문약(文弱)에 기울어지고 나라가 타락하여 불과
120년 만에
몽골족이 이끄는 원(元)에 멸망하였다.
금을 무너뜨린 원은
만주를 포함한 아시아 전역과 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지만,
거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족이 이끄는 명(明)에 의해 멸망하였다.
원이 멸망하면서
원의 잔당들과 여진족이 일부가 만주에 숨어 들어갔지만,
만주는 사실상 공백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만주를 다시 찾고자
북벌을 단행하였으나,
중도에서 좌절됨으로써
만주는 다시 우리 민족의 손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태종 및 세종 등
조선 초기의 왕들은
북방 개척에 열을 쏟는 동시에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거주하는 여진족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은 적어도 선조(宣祖) 때까지는
압록강 이북과 두만강 이북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건주여진에서 나온 누루하치가
여진을 결집하여
청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만주 전역을 장악한 청(淸)은
조선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명(明)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대제국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청이 중국 대륙을 장악한 이후
대부분의 여진족은 만주를 떠나 중국 대륙으로
들어갔고 만주는 다시 공백상태로 남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청조(淸朝)의 발상지에 관심이 많았던
청의 강희제(康熙帝)는 사신을 시켜
백두산을 답사케 한 후
압록강과 토문강이 분수령을 이루는 곳에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조선과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 지역에는
여진족이나 조선인이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만주를 봉금(封禁)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자
조선에서는 압정을 이기지 못한 조선인들이
만주의 봉금지역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중국의 한족(漢族)들도 기근을 피하여
만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므로,
조선과 청은
만주지역에서의 국경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특히
청은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土門江)을
두만강으로 곡해함으로써
양국의 국경문제는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과 청이 국경문제를 가지고 담판할 때
우리 대표 이중하는 간도가
우리 땅임을 당당하게 밝혀으나,
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양국의 국경선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1909년
청과 '간도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고
간도의 영유권을 포기해 버림으로써
우리 민족은 만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이 을사오조약과 한일합방으로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자 애국심에
불타는 많은 한인 지사들은
만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당시
한인 독립운동은 간도를 거점으로 한
동만주(東滿洲)에서의 독립운동,
서간도를 거점으로 한
남만주(南滿洲)에서의 독립운동,
그리고
북만주(北滿洲)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의 초기에는
안중근 의사의 이등(伊藤) 통감 사살,
봉오동 전투에서의 승리,
그리고 자랑스러웠던 청산리대첩등과 같은
놀라운 성과를 거둠으로써 한인(韓人)의 명성을 드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거한 뒤
1932년 3월 1일 소위 '만주국(滿洲國)'을 설립하자
상황이 급전되었다.
친일(親日) 만주국(滿洲國)의 등장은
200여만 우리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미치게 되었다.
우리 한인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마지막 거점을 상실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만주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접수되었고,
이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이 시점에서 다소라도 위안을 받는 것은
중국이 소수민족에게
자치를 부여하는 방침을 세움에 따라
1952년
'연변(延邊) 조선족자치구(朝鮮族自治區)'를
허락하였다는 사실이다.
1955년에는 중국정부가 길림성(吉林省)에 속했던
돈화현(敦化縣)까지를 편입시켜,
훈춘, 연길, 화룡, 왕청, 안도의 각 현(縣)을 일원으로
4만 3,547km2의 넓은지역에
조선족자치주를 수립하여 조선인이
민정을 운영토록 하고 있다.
이 조선족자치주의 면적은 거의 경상남북도의 전라남도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물론 중국 당국이 조선족자치주를 허락한 것은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대로 조선족자치주를 조선족에게
떼어 준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간도에 대한
조선족의 연고권을 고려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에 더하여 압록강 원류에서 칠도구(七道溝)가지 이르는
압록강 이북의 통화 지구내의 장백현(長白縣)을
'장백(長白) 조선족자치현(朝鮮族自治縣)'으로
하여 민정(民政)을 조선족에게
맡긴 데 대해서는 일말의 위안을 받는다.
# by | 2009/08/01 14:59 | 대한국의 역사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